★돈의문(敦義門) 별칭-서대문(西大門)★
1396년(태조 5년) 서울성곽 축조 당시 함께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711년(숙종 37년) 재건됐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차 궤도 복선화사업을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 동쪽의 흥인지문과 함께 서울 4대문 중 하나다.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 이라고 하고 새문,
신문 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처음 세워진 것은 태조 5년의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때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 네이버 지식사전 요약 -
서울성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613년간(1396년~2009년) 도성 역할을 수행하는 등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경쟁력을 갖춘 문화유산으로서 서울성곽(18.2㎞)이 체계적으로 보존, 활용되면 서울이
명실상부한 성곽수도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게 될것이다.


원래의 성곽자리에 있는 도로 건물 등으로 복원에 큰 어려움이 따를것으로 예상된다.

돈의문(서대문)과 성곽 주변 모습. 오른쪽이 성문 밖

돈의문(서대문)과 성곽. 중앙 성곽상단의 ▼ 표시가 돈의문 문루의 지붕이며 좌측의 산은 인왕산이다. 성곽 좌측편이 돈의문 바깟쪽 모습

1890년대 초중반 돈의문 외측 모습.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의 문루는 중층 구조로 축조 되었지만,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은 단층으로 지어진 모습이다. 규모로 볼때 사소문 정도의 크기다.

1890년대 중반 전차길이 놓이기 전엔 전봇대도 없다. 움직이는 피사체는 뭉개진 형상이다.

전차길 공사를 위한 자제일까?.. 돈의문 바깟쪽

배수로 인지 ? 전봇대 모습도 보인다. 外측
이 한장의 사진에 담긴 모습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왼쪽에 '장옷.을 쓴 부녀자, 가운데 도포나 중치막 내지는 창의를 입고 가슴에 가는띠를 두루고 갓을 쓴 사람과 가운데 뒤의 소년 모습, 오른쪽에 두루마기와 갓을 쓴 사람 등 등 어른들은 거의가 외출복을 입은 모습이다.
장옷 : 원래는 남여 공용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주로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내외용(內外用)으로 머리부터 내리쓰는 옷. 장의(長衣)라고도 한다. 보통 초록 바탕에 흰색 끝동을 달았고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용도의 '쓰개치마' 도 있는데 말그대로 치마 모양이다. 도포, 중치막, 창의 : 사대부(나중에는 일반인도)나 벼슬아치들의 외출복인데 소매가 넓거나 터진곳이 있는게 특징.
두루마기 : 말그대로 터진곳없이 막혀있다는 뜻. 외출시에 간편한차림의 겉옷으로 많이 애용된 옷.

서대문 밖의 모습

돈의문 外측. 전차길 모습도.. 이무렵 중절모와 갓을 쓴 사람이 나란히 가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돈의문(서대문)과 전차. 조선명소 경성사대문(돈의문) 한자와 서울 서대문이란 영문이 쓰인 엽서 중절모를 쓰고 햇볕을 가리기 위해 검은 우산을 쓰기도..(경성 최초의 노면궤도 전차 개통 서대문-청량리 구간)

대한제국 개통초기의 전차는 이런 개방형 전차였다. 태극문양은 대한제국시기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는 1898년에 미국인 콜브란(Collbran,H.) 등에 의해 처음 도입되어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계양된 날 서대문 밖의 풍경인데 무슨 날일까? (대한제국 -구한말). 귀중한 사진이다. 돈의문 홍예로 전차 궤도가 나있고 위의 사진에서 보면 그곳을 통해 전차가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부녀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얼굴부분은 손으로 감싸쥐고 중간과 아래는 옷이 벌어지지 않게 어떤 연결을 했고,, 성곽도보이고, 서대문 출입구의 홍예가 넓어 전차길이 통과된 모습이다.
 돈의문 밖의 전차길을 보수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무렵 초가집은 보이지 않고 기와집으로 많은 변모를 했다. 댕기머리 소녀의 모습도

돈의문 홍예로 통과하는 전차 수집하다 보면 상태가 좋지않은 것도... 확대하면 해상도가 더 못함.

왼쪽의 이렇게 커다란 삿갓도 있었나 보다 저 사람은 무엇을 파는 장수인지... 오른쪽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 하는 아낙의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돈의문(서대문) 주변의 집들과 사람, 전차로 번잡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전차가 통과하는 모습을 보면 홍예 출입구가 얼만큼 넓은지 짐작이 간다. (위와 같은 이미지. 왼쪽이 잘리고 오른쪽이 확장 된 사진이다)

사진촬영시기는 1890년대 후반에서 191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890년대 말 서대문안의 대한제국 군.

어깨총을 한 열 뒷쪽 성문앞과 오른쪽의 구 복장의 수문장으로 보이는 군인이 신식군복을 입고가는 군인을보고있는 것이 이채롭다.(위와 같은 이미지). 석축 위와 문루 아래 사이의 모습도 온전한 상태다.

이때부터 문루 아랫 부분이 훼손되기 시작 했네요. 이무렵 삿갓을 쓴 사람을 자주 볼수 있고, 도포인지 자락이 갈라진 모습이고, 오른쪽의 한복 차림새를 보니 이런 후레아(플레어)식 치마는 고급한복? 비교적 부유한 댁의 아낙이 아닐까...

1910년대 초의 서대문 풍경. 홍예부분 위 축성된 부분이 훼손이 된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도 장옷을 입은? 쓴?(애매합니다) 부녀자의 모습이.. 흑백사진의 장옷은 주로 녹색이라 검게 나오는데 그렇다면 오른쪽은 흰색은 '쓰개치마'를 쓴 모습 일까?

돈의문 편액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터
태조 이성계가 서울 도성을 만들 때 사대문의 하나로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웠던 문.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인 1915년 경성 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 복선화로 인해 강제 헐려 버려 흔적조차 없다. (대한제국때의 전차궤도는 사진에서와 같이 문루 아래 홍예로 통과 된 단선이였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충정로와 새문안길을 잇는 왕복 1차로, 길이 370m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2011년까지 철거하기로 했는데 아직도 그대로이다.
올 1월 27일 부터는 홍제고가차도 철거에 들어가 2월 20일까지 완료 한다고 하는데 서대문은 어찌된 것인지...
서대문 고가차도 철거, 돈의문 94년 만에 원형복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던 서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 철거된 이후 서울시내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미복원 상태로 있던 돈의문(서대문)은 현재 지적도, 지표 및 발굴조사, 전문가 자문 등을 통해 돈의문의 형태나 위치뿐 아니라 지형까지
그대로를 철거된지 98년 만인 2013년까지 원래 위치에 복원된다고 한다.
※ 사진의 년대는 우리나라의 전차(電車)가 최초 개통한 시기인 1899년 4월 초파일(양력 5월 4일), 돈의문-청량리 구간이고
(이 구간이 개통된 뒤 사대문안을 중심으로 연결), 또한 서대문이 헐린시기인 1915년을 참작하면 이해가 쉬울거라 여겨 집니다. |